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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여는 소리

[수필]최준렬 중앙산부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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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렬
기사입력 2014-08-13


 
▲ 최준렬 중앙산부인과 원장     © 컬쳐인
   조용히 문을 연다.
    그리고 새벽을 연다.

나의 도마소리는 어머니의 그것처럼 경쾌하거나 세련되지 않다.
피아노를 배우는 초보자의 연주처럼 곧잘 단절되곤 한다.

사과를 씻어 엎어놓고 나이프로 단호하게 이등분 한다.
그리고 또 이등분.
매번 씨방은 정확히 사등분되지 않는다.
V자로 씨방을 도려내고 과육의 손실을 적게 하기 위해 사과의 피부 바로 밑에 예리한 칼날을 밀어 넣는다.
새벽눈 밟는 소리를 내면서 벗겨지는 과피(果皮), 마침내 과육만 정갈하게 도마 위에 놓인다. 두툼한 껍질을 벗겨 바나나를 그 옆에 놓는다.

이제 어머니의 도마소리를 흉내 낼 수 있을까.
더 빠른 리듬을 탈 수 있을까

뽕잎을 덮고 잠자는 누에처럼 우리들은 솜이불 하나에 등을 맞대면서 긴 밤을 보낸다.
어머니의 도마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다. 태양이 이불 같은 어둠을 들추고 일어나는 시각이다.
잠의 뒷끝은 항상 미련이 많다.
지금 나의 가족들이 그러할까.

도마소리를 작게 하기 위해 손목의 힘을 뺀다.
어린 우리들의 잠을 지켜주기 위해 슬그머니 일어나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수건을 머리에 쓰셨을 어머니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접시와 컵을 내려놓는다.

나의 도마소리는 거창한 아침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껏 사과를 자르고 바나나를 토막 내서 믹서기에 집어넣고 요구르트 은박지에 성의 없이 십자모양의 칼집을 내서 따르고 스위치를 누르면 되는 일이다.

주방의 불빛은 따뜻하고 밝다. 침실과 거실이 지척이여서 굳이 주방이라 이름 붙였을 뿐 특별한 경계가 없는 공간이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지나 작은 부엌문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셨을 황량하고 컴컴한 부엌. 아궁이에 볏짚을 넣고 성냥골로 불을 붙여야 비로소 사위가 조금씩 분간되는 암흑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도마소리는 천재맹인의 현란한 피아노 연주, 그것이었을까.
가까워지다 멀어지는 아득한 꿈속에서의 소리처럼 분간할 수 없는 소리였다.
도마소리가 끝났는가 싶으면 손잡이 뒤끝으로 마늘 다지는 소리가 해조음처럼 이어지곤 한다.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파도 같은 파장 속으로 자맥질하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지금 나의 아내와 아들이 그러할까.

믹서기를 돌려야 할 시간이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믹서기의 요란한 소음. 스위치를 누르려던 손이 잠시 멈칫거린다.
어린 자식들의 잠을 깨우려던 어머니의 심정이 그러했을까.

갈아낸 사과쥬스를 컵에 나눠 따른다. 흘러내리지 않게 컵을 들고 식구들의 방문을 연다.
신선한 쥬스를 빨리 마셔주었으면.

두 개의 아침상에 빼곡히 둘러앉았던 우리들.
그러나 어머니의 자리는 생각나지 않는다.
가마솥에 다시 불을 지피고 부드러운 숭늉을 만들었을 것이다. 숭늉을 마시기 무섭게 10리 등교길을 재촉했을 우리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는 배가 부르고 행복했을까.

빵을 굽고 계란말이를 만들고 커피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딸기잼과 땅콩잼을 끄집어낸다.
정수기의 시원한 물을 컵에 받아 식탁을 차린다.
간소하고 편한 아침상이다.

밥과 국이 식기 전에 아침을 먹이기 위해 우리들이 덮고 있던 이불을 훌러덩 뒤집던 어머니처럼, 나는 아내와 아들의 방문을 힘차게 연다.
아직 마시지 않은 사과쥬스 색깔이 어둡게 변해있다.
어머니의 마음이 저렇게 타들어 갔을까.

이제 메스를 드는 시간이 줄어들고 나이프를 잡는 횟수가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다.
소란하고 거칠었던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힘들었다고 말했던 지난날들이다.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들의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새벽잠을 단호하게 밀쳐내고, 내 식솔들의 잠든 미각을 깨워 상쾌한 하루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시간이다.

주방에 들어가 차가운 물에 손을 씻으면서 어머니를 생각한다. 이른 아침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나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내일 아침 레시피를 궁리한다.
잠드시기 전, 어머니의 아침상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 마음을 헤아리면서 출근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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