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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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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렬
기사입력 2011-02-22


 
십리나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나는 중학교에 다니던 사촌 형의 손을 잡고 읍내까지 갔다. 처음 가보는 읍내는 낯설기도 했거니와 시장 앞을 지나다니는 많은 사람들과 어쩌다 눈에 띄는 커다란 버스가 무섭기만 했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던 포목점과 한약방, 질퍽거리는 사거리의 리어커 상인들이 나를 정신없게 했다.

키가 큰 편은 아니었는데도 입학일 보다 하루 늦게 등교한 나는 일렬로 늘어선 줄의 맨 뒤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쌀쌀한 3월의 운동장을 줄서 따라다녀야 했다.

말쑥한 차림새와 진한 화장을 한 읍내 아이들의 젊은 엄마들도 나를 기죽게 했다. 성안의 왕자나 공주처럼 내가 감히 넘나다 볼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등치가 컸던 풀빵집 아이 얼굴이 하얗던 제재소 집 아이 그리고 말쑥한 차림의 양장점 아이는 재벌가의 자손처럼 부럽기만 했다.

짧은 오전 수업이 끝나면 서둘러 집으로 도망치듯 달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쏟아지던 3월의 따스한 봄볕이 마냥 좋아 아픈 다리고 쉴 겸 논둑길 풀밭에 앉아 그 햇살을 즐기곤 했다.
 
 
나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학교생활에 익숙해졌고 3학년 겨울방학에는 주산공부를 위해 그 먼 학교길을 자청해서 다녔다. 겨울방학 때 혼자서 다니던 읍내의 학교. 주산공부가 끝나면 곧장 집에 가지 않고 극장 앞에서 서성거리거나 그 안을 기웃거리다보면 가끔씩 행운이 찾아오기도 했다. 영화가 거의 끝나가는 시간이면 개찰구를 지키던 아저씨가 보이지 않고 그 찰라 나는 쏜살같이 달려 극장 안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남녀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였던 것 같다. 시작부터 보지 않았으니 줄거리는 알 수도 없고 단지 완만한 경사의 산비탈을 남녀가 부둥켜안고 굴러 내려오던 흑백영화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영화가 끝난 읍내의 거리는 몹시 어두웠고 눈보라가 사정없이 나의 귀가를 저지하곤 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겨울밤 공동묘지가 있던 산길을 걸어가면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귀신소리를 내며 나와 소나무들을 홀려대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건드려 소나무에서 떨어지던 눈덩이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듯 뛰었고, 멀리 보이는 희미한 호롱불빛만이 나의 유일한 이정표가 되어주곤 했다. 마음 졸이며 걱정했던 부모님의 꾸지람에 고개를 숙이고 먹던 아랫목 이불 속에서 꺼낸 따뜻한 저녁밥이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내가 살던 마을에서 읍내의 학교에 같이 다니던 친구 한 명이 있었다. 오후반에 등교할 때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 햇볕을 피하라고 친구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밀짚모자를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이용으로 좀 멋을 낸 밀짚모자였는데 학교까지 쓰고 갈 정도의 배짱이 우리에게 없었다. 읍내 초입에 있었던 한약방에 밀짚모자를 맡기고 학교가 파하면 찾아 쓰고 오곤 했었다.
 
 

 
공동묘지를 조금 지난 산 속에는 외딴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에는 우리보다 서너 살 정도 많은 덩치가 꽤 큰 사람이 살고 있었다. 무슨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 어느 가을 날 하교길에 그가 우리 앞을 턱 가로 막고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탱자나무를 휘어 만든 활과 수수깡에 날카로운 못을 박아 만든 화살을 들고 시위를 한껏 당기며 우리 둘을 위협했다. 순간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걸음걸이에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활 쏘는 실력도 궁예처럼 탁월하지 않았을 테니까 설마 그가 화살을 겨누어 우리 둘에게 쏜들 맞을 확률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잽싸게 도망쳤으면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화살이 날아오면 피할 생각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슬금슬금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정신없이 내달렸다.

그 다음날부터는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잔뜩 긴장을 했고 소리를 죽여 신속하게 등하교를 했다.

그러데 언제부턴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 사건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져갔다.

몇 년 전 추석날 밤에 우리들의 고향마을이 아닌 분당의 어느 맥주집에서 아주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났다. 고향을 찾아 빠져나간 도심의 거리는 한적했고 쓸쓸하기조차 했다. 그래도 도심의 하늘에는 풍성한 달이 떠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겨워 우리는 가로수 밑의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눈이 많이 왔던 내 고향의 겨울, 눈보라치는 등교길에서 우리는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중학교에 다니는 형들은 우리들의 손을 잡아끌고 가까스로 학교에 갔던 일, 그리고 화살을 우리에게 겨냥했던 그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 불현듯 뾰족한 화살 끝의 공포가 되살아났고 얼마나 오랫동안 내 무의식 속에 살아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수술시 사용하는 날카로운 메스나 수술용 바늘 등 어떤 기구에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사용한다.

그러나 주사기에 꽂혀있는 예리한 주사바늘 만큼은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한다. 볼 때마다 눈을 찌푸리거나 자꾸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습관이 있다.

주사기바늘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은 아마 무의식 속에 남아있었을 내 유년에 나를 향하던 뾰족한 그 화살촉이 아니었을까? 술자리에서 어설픈 정신분석도 해보았다.

 
최준렬님은 중앙산부인과 원장이십니다. 소래문학회(http://cafe.daum.net/soraeliterature)에서 더 많은 글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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