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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렬
기사입력 2011-01-31


산골마을을 지키는 가을 같은 사람,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그 어디쯤의 한 토막 같은 그런 사람,
그리고 언제나 먼 나라 사람, 또 미운 당신에게 그동안 내 사는 얘기를 많이 했군요.
내 은빛 날개를 그저 드리우고 싶었습니다.
내 안의 은빛깔 새가 회치는 소리를 누구에게인가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내 - 냉정했습니다.
내게는 젊은 날의 마지막 낭만이었다고 기억될 것입니다.
하고, 언젠가는 아주 희미하게 잊혀질까요? ...
전주에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어느 장소에서 ‘바다의 협주곡’이 펼쳐졌어요.
그 멜로디는 귀에 익었는데 곡명은 몰랐지요.
얼마 후 곡명으로 알게 되었고 그 후 바다가 환희 열리는 듯한 그 곡을 들으면서 당신을 생각했고, 당신이 생각나면 그 곡을 들었답니다.
그 곡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헤아릴 수도 없지요.
아마도 당신은 그런 멜로디가 있는지조차도 모르실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당신은 조금도 매력이 없어요.
아니 나는 (중략)

 
서재에 꽂혀있는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다 책갈피에서 뚝 떨어진 편지 한통. 만년필로 써내려간 낯익은 필체를 보는 순간 불륜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서둘러 숨겨버린 편지를 오늘 꺼내 본다. 정말 예기치 않은 편지였다. 왜 버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책 속에 숨어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기간을 보낸 무의촌의 누추한 보건지소에 친구가 일행을 데리고 왔다. 내장산에서 백양사로 가을산행을 하다가 가까이에 있는 내 근무지에 들른 것이다. 비포장도로를 오래 걸어서인지 모두가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약속도 없이 만난 사람. 몇 시간 머무르다 막차를 타고 떠나면서 편지를 해도 되느냐고 묻던 그녀의 예쁜 웃음.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는 길을 떠나는 버스를 향해 나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녀는 종종 편지를 보내왔고 내 편지가 도달할 때쯤이면 어김없이 꽃잎처럼 날아든 그녀의 편지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았다. 위문편지처럼 산골마을을 외롭게 지키고 있는 나를 위로해주기도 하였고, 운동장 앞으로 보이는 남해바다의 풍경을 시처럼 아름답게 적어 보내주기도 하였다.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다보면 내가 있는 산골마을까지 남해바다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짭조름한 바다냄새와 해조음이 들리는 듯 했다. 그럴 때면 그녀를 만나러 그 바닷가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자주 만나기에는 서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편지로 만날 날과 약속장소를 정하다보면 약속한 주말은 아주 멀리 있었다. 토요일 늦은 시간에야 전주에서 만나 편지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어느 다방에 앉아 벽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던 그녀는 그림에 그려져 있지도 않은 달이 어느 방향에 떠있을 거라고 했다. 미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는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정말 액자 밖의 어디쯤에서 달빛이 비추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작품이 눈앞에 걸려있는 것처럼 선명하다. 그녀의 예리한 감수성이 편지에서 아니면 그런 대화에서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 했다.

어떤 이유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군대기간을 마치고 인천에 있는 수련병원으로 내가 올라오기 전 여름방학 기간이었을 것이다.오토바이를 타고 둘이서 찾아간 저수지 둑의 푸른 풀밭 위에서 우리는 서로 이별을 예감했을 것이다.그 만남 후에 내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볼일 없었던 내가 그때는 ‘까도남’처럼 꽤 비싸게 굴었던 모양이다.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도도 했을까. 견고한 성(城)을 쌓아 놓고 더 이상 내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을 내가 아주 얄미웠는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읽어보는 편지지만 아직도 그때의 아린 마음이 느껴진다. 왜 열정적으로 사랑하지 않았을까 후회되기도 한다.
 
‘젊은 날의 마지막 낭만’과 ‘희미하게 잊혀질까?’ 물어봤던 그 구절이 너무 마음 아프다.
순수하고 솔직한 젊은 시절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비록 헤어졌지만 그 푸른 우리들의 젊은 날이 지금 생각해도 설레고 눈부시다.

지금도 교단을 지키고 있을 그녀, 내가 보낸 편지 한통 남기지 않고 우리들의 젊은 한때가 너무 희미해져 기억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준렬님은 중앙산부인과 원장이십니다. 소래문학회(http://cafe.daum.net/soraeliterature)에서 더 많은 글들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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